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31년 화교배척폭동 (문단 편집) === 인식 문제 === [[만보산 사건]]은 화교배척폭동과 성격이 다른데도 이 둘을 묶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이미 비판이 나왔다. >『만보산사건 연구물들을 보면, 만주를 매개로 형성된 동북아 각 민족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민족관계들을 포괄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한↔중 또는 중 ↔일 양자 차원의 상호인식이나 쌍방관계에만 주목하고 있다. 게다가 기존 연구들은 표면상 연계되어 있지만 발생지역이 다르고 별도의 발생요인들까지 내포하고 있던 만보산사건과 조선화교배척사건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 설명함으로써 두 사건의 차별성을 간과해 버리고 있다.』[* 윤휘탁, 萬寶山사건 전후 동북아의 민족관계와 민족모순- 중국인의 사건 인식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10, 2011.6, 263쪽] 학자들은 이 점을 지적했는데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는 것이다. >『‘오기영과 김동인의 수기는 입을 모아 그 학살의 대상에 갓난아이도 포함될 정도로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배화 사건’은 조선인의 손으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이민족에 대한 증오 공격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기억은 ‘만보산 사건’의 기억보다 더욱 마음 편히 접근하기 어려운 연구 대상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배화 사건’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은 억압되어 있었다. ‘배화 사건’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는 한국문학사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찾기 힘들며, 전국적 규모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이만큼 문학적 형상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만큼 문제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9] >『‘배화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그 교훈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그 결과 ‘배화 사건’은 민족의식의 오용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식민주의자 일본으로서는 중국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기에 보도 통제와 의식적 외면 속에서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그러나 한국 사회가 점점 더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고 있는 현 시점이야말로 ‘배화 사건’을 불러내어 그 의미와 파장을 되새겨 보아야 할 때 일 것이다.』[*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1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